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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17 홋카이도와 아이누 이야기

홋카이도 이야기


일본의 최 북단 현인 홋카이도는 총 면적 77,981㎢로(남한의 약 63%) 세계에서 21번째로 큰 거대(?) 섬이며, 유명 관광지는 삿포로, 하코다테, 오타루, 다이세츠산, 노보리베츠 등. 많은 눈이 오고 바다가 얼 정도로 혹독한 겨울로 유명하며, 잘 보존된 자연 덕분에 겨울 시즌에는 스키와 스노우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많음.

우리나라에는 영화 러브레터를 통해 많이 알려짐.



빙하기 때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구석기를 거치며 각 섬이 분리되고 고립되면서 토기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조문(빗살무늬 토기)문화를 형성했다는 것이 학설 중 하나.

'에미시'로 불리던 원주민은 중세 이후 '에조(이민족이라는 차별의 의미)'로 불리며(홋카이도 땅은 '에조치(蝦夷地)'), 농경을 주축으로 수렵, 어업을 특화해 쌀, 철 등을 본토와 교역.


일본 본토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카키자키' 가문에서 부터 시작되는데,

카키자키 가문은 센코쿠 시대 때 혼슈, 시코쿠, 규슈에 있던 다이묘들이 티격태격 싸울동안 유일하게 훗카이도에서 독보적으로 크게 성장한 군벌 세력으로, 후에 6대 다이묘인 카키자키 요시히로가 성씨를 '오대로(五大老)[각주:1]'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성인 '마츠다이라(松平)'씨의 '마츠(松)',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마에(前)'를 받아 '마츠마에(松前)'씨로 개성했고, 에도 막부 건립이후 '마츠마에 번[각주:2]'의 기초가 됨.


센코쿠시대(1467-1573) 중엽 카키자키 가문은 에조치의 '도난(島南)(홋카이도의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북방무역을 하였으나, 아이누족과의 대립이 발생하고 결국 아이누의 지도자 코샤마인을 죽이며 에조치의 지배권을 가지게 됨.

'안도(安東)' 가문의 지배하에 있던 카키자키 가문은 1583년(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68-1698) 도요토미 정권에 붙으며 안도 가문으로 부터 독립되어 에조치와 사할린 전체의 지배권을 인정받게 되었고, 1599년에는 에도막부(도쿠가와 이에야쓰 정권)에도 복종하며 다시 한 번 지배권을 공인받으며, 1605년에는 에조와의 무역 독점권 까지 인정 받게 됨. (이무렵 가문의 성씨를 '마쓰마에'로 바꿈)


에도시대(1603-1868) 말 러시아가 남하하며 통상 요구가 시작되었고, 북방에 대한 대응을 일개 번에게 맡기기 힘들다고 판단한 막부는 1807년 마쓰마에번을 무쓰노쿠니(현재의 센다이 지역) 야나가와번으로 이봉[각주:3]하고 번의 영지를 막부의 직할로 두었으나, 1821년 다시 반환하면서 지배권과 함께 북방 경비를 위임함.

하지만 1854년 미일친화조약이 체결되어 하코다테가 개항됨에 따라 다시 한 번 에조치의 중요성이 높아지며 동부 영지 일대가 다시 막부로 반납되었으며, 1868년 메이지 정부는 에조치에 하코다테 재판소를 설치하며 여러 외국과의 교섭 등 막부의 북방 정책의 거점으로 삼음.


국가의 모든 정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에도막부는 19세기 후반 외국의 개항 압박에 대한 미숙한 대처와 '존황양이[각주:4]' 사상의 대두로 혼란기에 접어들었고, 1867년 사츠마 번과 조슈 번이 에도막부 타도를 위한 동맹을 맺게되는 등 일련의 사건과 함께 막부의 전제 정치에 대한 민중과 다이묘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그 기반이 붕괴될 조짐을 보임.

시코쿠 남부를 지배하던 도사 번은 사츠마 번과 조슈번의 동맹을 견제하여 신정권을 수립하고자 에도막부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주라'고 권고하는 타협안을 제시하게 되고, 힘이 약해진 쇼군은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뒤에도 새로운 정치체제 아래에서 권력을 장악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 방안을 수용.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7년 11월 9일 천황에게 통치권 반환을 신청하고, 다음 날 천황이 이를 허가하며 12세기 부터 19세기 까지 이어져 온 쇼군 중심의 봉건제도 사회, 일본의 군부 정권이 무너지며 메이지유신이 완성되는데, 이 정치적 사건을 '대정봉환(大政奉還)[각주:5]'이라고 함.


                               보신전쟁 당시의 사무라이들


범(汎) 친(親) 에도막부 세력(도쿠가와 막부, 에조 공화국[각주:6], 오우에쓰 열번 동맹)은 대정봉환에 불복하며 일본 전역을 아우르는 내란인 '보신전쟁[각주:7]'을 일으켰지만, 사츠마번, 조슈번, 도사번을 주축으로 한 신정부군에 의해 토벌됨.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와 함께 일본제국의 수립을 선언하였고, 1868년 5월 3일 에도는 일본제국군의 손에 떨어 지게 되었으며, 도쿠가와 막부는 결국 붕괴.


1869년 에조치는 '홋카이도[각주:8] [각주:9]'로 개칭되며 본격적인 개척이 시작됨. 1886년 통일된 행정기관으로 홋카이도청이 만들어지고,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 의해 많은 일본인들이 이주되었으며, 석탄이 발견되면서 수많은 탄광이 개발되어 이를 수송하기 위한 철도가 종-횡으로 설치됨. 이 '개척'은 아이누족의 토지 수탈, 강제 이주가 수반되어야 했기 때문에 "일본제국에 의한 침략[각주:10]"이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음.


1950년 홋카이도를 개발하기 위해 조사·입안 및 실시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홋카이도 개발청이 총리부의 외국으로서 설치되었으며, 홋카이도 내에는 홋카이도 개발국과 각 지방에 개발 건설부가 놓여 개발에 임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돌아온 병사와 구 식민지로부터의 귀환자의 정착지로서 홋카이도가 주목받아 인구가 급증했고, 전후 부흥과 고도 경제성장기 초에는 홋카이도의 석탄이 귀중한 보물이 되어 많은 탄광 노동자가 홋카이도에서 살았지만, 1960년대에 석유로의 에너지 전환이 일어나 1980년대 까지 대부분의 탄광이 폐광됨.




부록 : 북방 4도(+쿠릴열도) 이야기

출처 : 지금은 사라진 Yahoo Blog의 ppao2님의 포스트 + 위키피디아


글을 읽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 쿠릴 열도와 북방 4도는 다름.

쿠릴 열도는 캄차카 반도에서 홋카이도로 이어지는 모든 섬,

북방 4도는 쿠릴 열도 중 홋카이도와 가까운 구나시리, 에토로후, 시코탄, 하보마이 제도(군도)를 지칭함.


북방 4도의 존재는 에도시대(1603~1868) 이전 부터 알고 있었으나, 1786년 에도막부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모가미 토쿠나이(最上徳内)'를 보내 홋카이도 동부와 사할린, 구나시리, 에토로후 등의 지역을 조사하면서 정확히 파악하게 됨. 에토로후에는 이미 러시아 사람들 일부가 진출해 있었으나, 일본인들의 진출이 점차 늘어나면서 1855년 일본과 러시아 간의 영토 범위를 협의하는 러일화친조약[각주:11]을 맺게 됨.

하지만 이 조약에서 공동관리구역으로 둔 사할린(가라후토)에는 일본과 러시아 양쪽이 모두 진출해 두 국가가 공존하는 상태가 되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1875년 사할린 전체를 러시아가 지배하는 대신 쿠릴열도 전체를 일본측에 할양한다는 내용의 상트페테부르쿠조약을 체결함.

일본은 당시 개발 진행중이던 홋카이도가 사할린의 영유권 보다 먼저였고, 쿠릴 열도의 18개 섬을 일본 영토로 만들 수 있었으므로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


이 후 러일전쟁(1905년) 말기 쓰시마 해전[각주:12]에서 승리한 일본이 사할린 전체를 점령하게 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이 중재한 포츠머스조약[각주:13]을 통해 북위 50도선 남쪽의 사할린 섬 절반을 러시아로 부터 할양 받게 되었으며, 1945년 까지 사할린 섬 남부와 캄차카 반도 바로 앞의 쿠릴열도 전체가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오게 됨.


그러나 1945년 2차대전에서 패한 일본이 센프란시스코조약을 통해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 조건'으로 '쿠릴열도와 사할린 남부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것'에 서명하면서 사할린과 쿠릴열도는 소련(러시아)의 영토가 되었고,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역시 일본의 통치 범위 밖으로 지정함.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중 2장 2항의 '영토 포기 또는 신탁 통치 이관'에 관한 내용


①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자격, 영유권을 포기한다.

② 일본은 대만과 펑후 제도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다.

 일본은 쿠릴 열도와 사할린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다.

④ 남태평양의 구 위임통치지역은 미국이 신탁통치하며,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의 신탁통치 예정지역으로 삼는다.

⑤ 일본은 일체의 국외 자산과 조약체결국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한다.


센프란시스코 조약 초안 단계에서 '일본이 포기할 쿠릴 열도'가 어디까지 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구나시리와 에토로후가 쿠릴 열도에 포함되지 않으며 일본 영토로 남는다고 주장했으나, 일본 정부는 구나시리와 에토로후 섬 까지 쿠릴 열도에 포함된다는 내용의 답변을 했고, 영국과 프랑스 역시 일본 정부와 동일한 입장을 표명함.


하지만 소련은 2차대전 종료 직전 일본과의 불가침조약[각주:14]을 깨고 이 섬들을 이미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중국[각주:15]이 평화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센프란시스코조약에 서명하지 않음.


당시 북방 4도 지역에는 약 1만7천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으나 소련과의 합의에 따라 1949년 까지 본토로 귀환됨. 하지만 이 때 일본 국적을 박탈당한 한국인들은 귀환 대상에서 제외되어 그대로 남거나 사할린 섬으로 이주해 냉전 당시 억류 한국인 문제의 불씨가 됨.

일본은 1956년 소련과의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센프란시스코조약에서 소련이 서명하지 않은것을 근거로 북방 4도를 포함한 쿠릴열도 전체와 사할린 남부까지 일본에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고, 회담을 거듭한 끝에 소련측이 하보마이 제도와 시코탄 섬을 반환하는 것으로 합의[각주:16]. 하지만 소련과 냉전중인 미국이 개입해 구나시리, 에토로후의 반환까지 요구하지 않으면 오키나와를 영구히 일본에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 정부를 압박했고, 결국 시코탄, 하보마이를 반환할 것이라는 공동선언문에 그치게 됨.



결국 일본과 소련의 국교는 정상화 되었지만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않았고, 1961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실시한 것에 반발한 소련의 흐루시쵸프가 "영토 문제는 끝났다"고 발언하며 하보마이와 시코탄을 넘겨주기로한 제안을 취소하게 되었으며, 이 후 부터 일본은 에토로후와 구나시리 섬 까지 반환을 요구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꿈.

이후 고르바초프 정권에서 1956년의 공동선언을 존중하는 태도로 바뀌면서 일본에게 시코탄과 하보마이의 반환에 대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으나, 일본 측에서 4도 전체 반환을 요구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협상이 되지 않음.


현재 일본 정부는 시코탄, 하보마이 뿐 만 아니라 4도를 일괄 반환 받는 것을 공식 견해로 하고 있으나, 정치가들 사이에서는 2도 만이라도 먼저 반환 받을 것을 주장하는 2도 선 반환론, 2도만 받고 끝내자는 2도 반환론, 최근에는 북방 4도의 면적을 절반으로 나눠서 가지는 것은 어떠냐고 주장까지 있음.


러시아는 일관되게 시코탄, 하보마이를 반환하면 최종적으로 결착이 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으나, 최근에는 2도 반환 조차도 비판적. 소련과 러시아의 경제가 어려웠을 시기에는 북방 4도 주민들이 경제대국인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을 원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전망도 있었으나, 요즘은 러시아의 경기가 매우 좋기 때문에 시코탄, 하보마이에 거주하는 러시아 사람들도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을 찬성하지 않음.


이 섬들의 인구 증가(현재 북방 4도에는 약 1만7천명의 러시아 주민이 거주 중)와 발전에 따라 현실적으로 점점 반환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고, 일본 정부도 반환 후의 주민들에 대한 정책을 전혀 내놓지 않고 있으므로 진짜로 북방 영토를 되찾을 생각이 있는지 의문시하는 견해도 있음.


지도에서 북방 4도의 면적을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모두 합치면 5,036로 경기도의 절반 크기로 무시할 수 없는 면적이며, 영해의 중요성도 있으므로 일본으로서는 포기하기 쉽지 않을것.


황당한 마무리를 하자면,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했기 때문에 사할린 남부와 북방 4도 이외의 쿠릴 열도는 일본의 통치 범위에서 제외되지만, 소련은 조약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소련)의 지배 역시 국제법상 인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어느 미친 우익의 주장같지만- 일본의 공식적인 견해. 때문에 일본에서 판매되는 지도를 보면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 섬 남부와 에토로후 섬 이북의 쿠릴 열도는 러시아 땅이 아닌 '귀속 미정 지역'으로 취급되어 공백으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고 북방 4도는 일본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음.(아래 지도 참조)





아이누 이야기


01


홋카이도 섬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은 외모나 풍습이 다른 일본인들과 뚜렷하게 구별되어 그 기원과 원(原) 일본인과의 관계 등이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옴.

전통적인 아이누인들은 몸과 얼굴에 털이 많으며 눈이 깊고 코가 오뚝하여 얼굴의 윤곽이 또렷하고, 미간이 좁고 눈썹의 길이가 매우 길며 대부분 쌍꺼풀을 가지고 있는 등 얼굴이 편평한 몽골로이드(Mongoloid)의 일반적인 외모와는 다르기 때문에 한때 코카소이드(Caucasoid)[각주:17]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아이누 백인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으며, 다른 일본인과 인종적으로 구분된다는 이러한 사고는 메이지 이후 일본 정부의 민족 말살적인 동화 정책의 기초가 됨.


최근에는 DNA 분석 등으로 아이누와 원(原) 일본인과의 관계가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오늘날에는 아이누를 '북방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랭지 적응을 하지 않은 고(古) 몽골로이드'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남방계 몽골로이드의 일부가 북으로 이동을 시작해 오랫동안 오키나와와 일본 열도에 정착해 조몬문화의 주역이 되었다가 북방계 몽골로이드(야요이 인)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는데, 야요이(彌生) 인들과 동화된 것이 후대의 일본인이고, 동화되지 않은 채 동북 방면으로 옮겨가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것이 아이누의 기원이라는 주장도 있음.

이처럼 오늘날에는 아이누가 다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고(古) 몽골로이드를 조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의 신체적 특징 역시 현재까지 고(古) 몽골로이드의 특징을 많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유력한 학설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으며 각 학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 자료들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


                              1904년에 찍은 아이누족의 모습


15~18세기만 해도 아이누인들은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캄차카(Kamchatka) 반도의 남부, 북쪽으로는 사할린의 남부, 남쪽으로는 일본 혼슈의 동북부 지역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었고, 사할린의 북쪽이나 헤이룽강(黑龍江) 유역, 캄차카 반도까지 교역을 하고 있었다고 함.

주거의 분포에 따라 '홋카이도 아이누'와 '사할린(樺太) 아이누', '쿠릴열도(千島) 아이누'로 나뉘는데,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아이누는 북방 민족이나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홋카이도의 아이누와는 문화적 차이를 나타내지만, 강제 이주 등으로 오늘날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홋카이도의 아이누도 급격한 인구 감소와 민족 정체성의 상실 위기를 겪고있음.


근대 이후 일본 정부와 사회는 아이누의 문화와 전통을 미개(未開)시하고 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켜야 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는데,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 개척 과정에서 강제 이주, 토지 약탈, 전통적 생활 관습을 금지하는 등, 오랜 기간 독특한 문화를 가꾸어왔던 아이누의 전통 문화를 파괴, 억압, 차별함.



02


1869년 하코다테의 고료카쿠[각주:18]로 도망친 에노모토 다케아키[각주:19] 이하의 막부 잔당을 제압한 신정부는 같은 해 개척사(후의 홋카이도청)를 설치하고, 1873년 '지조개정령'에 의해 아이누모시리[각주:20]를 천황의 재산으로 편입한 후, 민간에게 대부분을 불하[각주:21]함. 땅의 사유 개념이 없는 아이누 민족의 사지를 고대 부터의 침략자인 덴노가 다루어 일부 재벌에게 불하했던 것이며, 현재 홋카이도에 '미츠이'의 토지나 사유림이 많이 존재하는 이유가 이때의 불하 때문이라고 함.


또, 신(덴노) 체제 정부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개척사로 보내 러시아를 의식한 북변 방위를 담당하게 하는데, 이는 15년 전쟁[각주:22] 중 중국 동북부(만주)에 개척단을 보내 대소 방위에 임하게 하고, 막상 소련군이 공격해 왔을 때에는 군대만 도망쳐 왔을 때의 발상과 비슷함. (쉽게 말해 총알받이로 이용했다는 이야기)


아이누를 '일본'에 편입한 메이지 정부는 철저한 동화 정책을 취했고, 아이누의 전통적인 풍속·습관을 금지해 성씨 개명을 실시하게 함. (후의 조선 지배의 원형)

몇 안 되는 어장과 농지가 주어졌지만, 토지의 사유 개념이 없고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아이누에게 나눠진 재산은 일본인들의 먹이감이 됐으며,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계약을 하게 하는 방식은 청부제[각주:23]가 시작된 이후 자주 사용되었음.


이런 상황에서 1899년 '홋카이도 구토인 보호법'이 만들어졌으나, 차별 의식으로 가득 찬 이 법률로 실제 구해진 아이누는 없었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농업에 종사하거나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1만 평 이내의 사지가 급부됐지만, 이 토지는 산속이나 황무지 등 경지로는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으며, 위에서 얘기한 것 처럼 토지 소유의 개념과 문자가 없는 아이누인들에게는 그것을 신청하는 것 조차 힘들었던 것. 게다가 15년간 개간하지 않으면 몰수되는 규정이 있어 알지 못하는 동안에 토지를 빼앗기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며, 심지어 2차대전 패전 후 농지 개혁에 의해서 급부된 토지조차 빼앗아 버렸다고 함.

이렇게 마음대로 법률이라고 하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수탈하는 병합 방식은 조선 병합과도 유사점이 많음.

원래 수렵 민족인 아이누 민족은 다이와 민족처럼 농업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지로는 부적합한 땅을 변변한 기술 지도 조차 없이 억지로 개간하고 밭을 경작하도록 만든 것.



03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파시즘이 대두해 황민화 교육[각주:24]이 시행되면서, 아이누 문화는 뒤떨어진 것으로서 취급되고 차별되어 민족 말살의 정도가 더욱 강해지는데, '천황의 국가에서 차별받는 사람이 그 고통을 극복하려면, 일본인 이상으로 '충성도 높은 신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제적으로 요구받게 됨.

1945년 미군 상륙으로 일본군의 전세가 불리해 지자 오키나와 마을 주민들이 집단 자살한(집단 자살시킨) '도키시키 사건'이나, 2차대전 중 미국의 일본계 2세 부대의 활약, 베트남 전쟁중의 흑인도 이와 유사한 형태.


2차대전 패전 후 농지 개혁으로 아이누의 토지를 빼앗는 등, 샤모[각주:25]에 의한 아이누의 수탈은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음.

고도 경제성장기에는 '토마코마이 동부 개발 계획'에 의해 그나마 조금 남은 땅 까지도 빼앗았고, 현재도 이권을 고집하는 공무원과 기업이 일체가 되어 아이누의 성지인 비라토리쵸·니부타니를 댐의 바닥에 가라앉힘.


고대 천황제 국가로 시작해, 그 후 무신 정권, 그리고 메이지 이후의 근대 자본주의국가에 이르기까지, 쉬는 일 없이 행해지고 있는 아이누 침략 역사에 대해 현대의 샤모의 자각이 필요함.


일본 아이누문화진흥법 시행 10년을 맞은 2007년, 아이누 민족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홋카이도 거주 아이누 민족이 조직한 홋카이도 우타리(동포) 협회의 가토 다다시(加藤忠) 이사장은 도쿄(東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헌법 개정 논의에서 아이누민족의 권리가 명기될 수 있도록 노력할 방침"이라고 밝히고, "일본정부는 아이누민족을 선주(先住) 민족으로 인정해야 한다"며 "헌법에 '아이누 민족'이라는 문구가 들어가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공적인 차별 현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

일본은 메이지(明治)시대 이래 홋카이도 구토인(舊土人)보호법 등을 토대로 아이누민족의 토지와 문화를 강탈했고, 열등민족 취급을 받았던 아이누민족은 사회적 약자로 전락했으며, 심한 차별과 편견 속에서 고통받음. 1997년 뒤늦게 아이누문화진흥법이 제정되면서 아이누인과 문화에 대한 인식이 개선돼 왔지만 아직도 차별과 편견은 뿌리깊게 남아 있으며, 가토 이사장의 헌법 명기 요구는 아이누민족의 사회적 권리회복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


일본 정부는 아이누민족의 독자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으나, 정치적인 분리ㆍ독립과 토지 반환, 보상 요구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선주권을 의식해 선주 민족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음. 일본 정치권의 인식은 아이누민족이 이미 (일본인으로) 동화됐으며, 일본은 단일민족에 가깝다는 의견.


공식적으로 인정된 일본 내의 아이누족은 약 2만 5천 명이지만, 극심한 차별 때문에 아이누족임을 숨기거나 인종차별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부모가 알려주지 않아 아이누족 출신임을 모르는 경우도 있어서 정확하지는 않으며, 비공식적으로는 20만 명까지 추산되기도 함. (러시아에는 약 5만 명이 살고 있음.)





출처 : 위키피디아의 많은 글들 (부록 제외)


  1. 오대로(五大老): 일본 센고쿠 시대, 토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가장 유력한 권력을 가진 다섯 명의 다이묘. 히데요시가 생전에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게 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며, 원 취지는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호시탐탐 기회를 넘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한 방안이었음. [본문으로]
  2. 번(藩): 일본의 역사에서 제후(諸候-일정한 영토를 다스리는 작위)가 다스리는 영지를 가리키는 말로, 1만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보유한 봉건 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한 영역과 그 지배기구를 가리키는 역사용어로 사용됨. (1석=성인 1명이 1년 동안 먹는 양의 쌀) [본문으로]
  3. 이봉: 제후(諸侯)의 영토를 다른 곳으로 옮김. [본문으로]
  4. 존황양이(尊王攘夷): 천황의 고대적 권위에 기초해 황실을 군신 관계의 최고의 표현으로서 존중하는 사상과 유학의 화이(華夷)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에도 말기 외국과의 통상에 반대하고 외국의 격퇴를 주장하는 봉건사상이 합쳐진 사상. [본문으로]
  5. 대정봉환(大政奉還): 도쿠가와 막부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는 것을 선언한 정치적 사건. [본문으로]
  6. 에조 공화국(蝦夷共和國): 1869년 1월 대정봉환에 불복한 에도막부 세력이 모여 하코다테를 수도로 하는 에조공화국을 건국하였으나, 그 해 5월 18일 보신전쟁(하코다테 전쟁)이 끝나면서 소멸됨. 정부 조직은 미국을 본땄으며, 에도막부의 신하들을 위한 개척지로 삼음. 당시 선거로 통령을 선출한 것을 들어 에조 공화국이야말로 일본의 민주주의 시발점이었다는 일부 학자들의 의견도 있다고 함. [본문으로]
  7. 보신전쟁(戊辰戦争): 1868년 부터 1869년 사이에 일본에서 일어난 일련의 내란으로, 한자를 음역해 무진 전쟁(戊辰戰爭)으로 부르기도 함. [본문으로]
  8. 홋카이도 개칭: 7세기 후반에 성립된 *고키시치도의 사이카이도, 난카이도, 도카이도 등의 도 이름을 모방한 것으로, 에도 막부 말기에 에조치를 탐험한 마쓰우라 다케시로가 명명자로 알려져 있음. 그는 '홋카이(北加伊)', '가이호쿠(海北)', '가이토(海島)', '도호쿠(東北)', '지시마(千島)', '히다카미(日高見)'의 6가지 후보를 제안했는데, 의견서를 통해 '가이(加伊)'는 선주민인 아이누인들이 이 섬을 부르는 명칭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 가이를 같은 발음의 '가이(海)'로 바꾸어 고키시치도의 명칭을 모방해 '홋카이도(北海道)'로 정했다고 함. 하지만 아이누어 학자였던 긴다이치 교스케(金田一京助)는 아이누어에 '카이(カイ)'라는 단어가 없다는 점을 들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 따라서 '카이'(カイ)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음. 일본 동북 지역에는 지금도 아이누 언어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이 남아있는데, 홋카이도에는 특히 많아서 삿포로, 왓카나이, 오타루, 토마코마이 같은 주요 도시들의 이름이 모두 아이누 언어에서 유래. (미국 중서부의 지명들이 인디언 언어에서 유래한 것과 흡사.) [본문으로]
  9. 고키시치도(五畿七道): 아스카 시대부터 사용된 일본의 옛 광역 행정 구역으로, 기나이의 다섯 '*구니'(国-일본의 옛 행정 구역 단위로, 나라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지리 구분에서 기본 단위로 사용됨)와 일곱 '도(道)'라는 뜻. 무로마치 시대 이후에는 행정 구역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지역 이름으로는 계속 사용됨. [본문으로]
  10.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는 아이누족의 신화와 생활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함. [본문으로]
  11. 이때 정한 경계선이 에토로후 섬과 우룻푸 섬의 사이였으며, 이 조약은 현재까지 일본이 에토로후 섬 까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음 [본문으로]
  12. 쓰시마 해전(日本海海戦, Цусимское сражение): 1905년 러일 전쟁 중 쓰시마 섬 부근 바다에서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발트해 함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노급전함을 주력으로 한 함대가 정면으로 격돌한 최대의 해전으로, 일본 해군이 승리하고고, 러시아 발트해 함대는 전멸. 일본에서는 일본해 해전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동해 해전이라 부름. 이후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음. [본문으로]
  13. 포츠머스조약의 주요 내용: (1)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또 조선에 대해 지도·보호·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2) 러·일 양군은 랴오둥 반도 이외의 만주 지역에서 철수하며 만주에서 청나라의 주권과 기회균등 원칙을 준수한다. (3) 러시아 정부는 청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 랴오둥 반도(뤼순, 다롄) 조차권, 창춘-뤼순 간의 철도, 그 지선,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모든 권리와 특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4) 양국은 만주의 철도들을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경영한다. 단 랴오둥 반도 지역은 예외로 한다. (5) 일본이 배상금을 청구 하지 않는 대신,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 섬, 그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비무장지역으로 하며, 소오야(宗谷), 타타르(Tatar) 해협의 자유 항행을 보장한다. (6) 동해·오호츠크 해·베링 해의 러시아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인에게 허용한다. ///// 국제 사회는 (1) 조항으로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공인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 권익을 인정한 것일뿐 한국 병합을 용인한 것은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다. (2)~(4) 조항은 러시아와 일본이 하얼빈을 경계로 만주를 남북으로 분할한다는 말이 된다. [본문으로]
  14. 2차대전 중 일본과 소련은 1946년까지 중립 조약을 체결했는데, 소련이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을 침략한 것은 조약위반이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도쿄재판에서 불가침 조약 자체가 불성실한 것이었고 소련 참전은 미국측이 요청했기 때문에 소련의 대일 선전 포고는 정당한 것이었다고 최종 판결되었음. [본문으로]
  15. 2차대전 종료 시점 연합국의 주요 일원이었던 장개석의 중화민국 정부는 모택동에게 밀려 대만으로 쫓겨난 상태였고, 연합국 대표 일원인 중국 대표가 중화민국 정부인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인지 연합국 간의 의견이 엇갈리는 상태에서 결국 중국 대표의 서명은 이루어지지 않음. (미국은 타이완에 있는 중화민국을 중국 대표로 초청하기를 원했지만, 영국은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로 초청하길 원했고, 그에 대한 타협안(?)으로 어떤 정부도 초청되지 못했음) [본문으로]
  16. 아래 지도를 보면 구나시리, 에토로후 두 섬은 캄차카 반도에서 홋카이도로 이어지는 쿠릴열도의 한 부분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하보마이 제도와 시코탄은 이 섬들보다 남쪽에 있고 홋카이도의 동쪽 끝에 있는 네무로 반도의 끝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쿠릴 열도의 일부가 아닌 홋카이도의 일부라고 해석 하는 것도 가능. [본문으로]
  17. 코카서스인종: 유럽을 중심으로 북아메리카·서아시아에 사는 인류집단 [본문으로]
  18. 고료카쿠(五稜郭): 에도 시대 말기에 세워진 지금의 홋카이도 하코다테 시에 있는 요새로, 하코다테의 유명 관광지. [본문으로]
  19.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에조공화국을 건국한 인물로 보신전쟁에서 마지막 까지 저항했으나, 항복 후 메이지 정부의 편에서 일함. [본문으로]
  20. 아이누모시리: 아이누 사람들이 홋카이도를 부르는 말로,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뜻. [본문으로]
  21. 불하: 국가나 공공 단체의 재산을 민간에 팔아넘김. [본문으로]
  22. 15년 전쟁: 1931년 9월 만주사변부터 1945년 8월15일 패전까지의 전쟁 [본문으로]
  23. 청부제(위탁경영): 부도난 기업이 법정 관리를 신청하면 기업의 경영권은 법정 관리가 끝날 때까지 법원에 넘어가는데, 이때 법원을 대리하여 선정된 대리인이 회사가 정상화되어 제삼자에게 인수될 때까지 대신 경영하는 제도. [본문으로]
  24. 황민화 교육: 일본 및 그 식민지에서 주민들에게 일본 천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교육 정책. [본문으로]
  25. 샤모: 아이누인들이 일본인을 부르는 호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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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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