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기의 M+ M- MRC 버튼

공부 2013. 6. 19. 14:21 |

http://www.funshop.co.kr/vs/detail.aspx?itemno=23121&mail=1


오늘 펀샵에 올라온 계산기인데,

상품 설명을 보다 보니 그 동안 신기하리만큼 궁금해 하지 않았던 기능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바로 M+ M- MRC 기능.

한 번만 알아두면 아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니 3분만 투자해서 연습해 두어야겠다.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홋카이도와 아이누 이야기  (0) 2013.06.17
대한민국 종교 인구 통계  (0) 2013.05.27
아프리카가 가난한 이유  (0) 2012.12.30
이 나라 근대사의 진실  (0) 2009.09.03
우리가 알고있는 엉터리 세계지도  (0) 2009.09.03
Posted by kanwa
:

홋카이도 이야기


일본의 최 북단 현인 홋카이도는 총 면적 77,981㎢로(남한의 약 63%) 세계에서 21번째로 큰 거대(?) 섬이며, 유명 관광지는 삿포로, 하코다테, 오타루, 다이세츠산, 노보리베츠 등. 많은 눈이 오고 바다가 얼 정도로 혹독한 겨울로 유명하며, 잘 보존된 자연 덕분에 겨울 시즌에는 스키와 스노우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많음.

우리나라에는 영화 러브레터를 통해 많이 알려짐.



빙하기 때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구석기를 거치며 각 섬이 분리되고 고립되면서 토기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조문(빗살무늬 토기)문화를 형성했다는 것이 학설 중 하나.

'에미시'로 불리던 원주민은 중세 이후 '에조(이민족이라는 차별의 의미)'로 불리며(홋카이도 땅은 '에조치(蝦夷地)'), 농경을 주축으로 수렵, 어업을 특화해 쌀, 철 등을 본토와 교역.


일본 본토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카키자키' 가문에서 부터 시작되는데,

카키자키 가문은 센코쿠 시대 때 혼슈, 시코쿠, 규슈에 있던 다이묘들이 티격태격 싸울동안 유일하게 훗카이도에서 독보적으로 크게 성장한 군벌 세력으로, 후에 6대 다이묘인 카키자키 요시히로가 성씨를 '오대로(五大老)[각주:1]'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성인 '마츠다이라(松平)'씨의 '마츠(松)',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마에(前)'를 받아 '마츠마에(松前)'씨로 개성했고, 에도 막부 건립이후 '마츠마에 번[각주:2]'의 기초가 됨.


센코쿠시대(1467-1573) 중엽 카키자키 가문은 에조치의 '도난(島南)(홋카이도의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북방무역을 하였으나, 아이누족과의 대립이 발생하고 결국 아이누의 지도자 코샤마인을 죽이며 에조치의 지배권을 가지게 됨.

'안도(安東)' 가문의 지배하에 있던 카키자키 가문은 1583년(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68-1698) 도요토미 정권에 붙으며 안도 가문으로 부터 독립되어 에조치와 사할린 전체의 지배권을 인정받게 되었고, 1599년에는 에도막부(도쿠가와 이에야쓰 정권)에도 복종하며 다시 한 번 지배권을 공인받으며, 1605년에는 에조와의 무역 독점권 까지 인정 받게 됨. (이무렵 가문의 성씨를 '마쓰마에'로 바꿈)


에도시대(1603-1868) 말 러시아가 남하하며 통상 요구가 시작되었고, 북방에 대한 대응을 일개 번에게 맡기기 힘들다고 판단한 막부는 1807년 마쓰마에번을 무쓰노쿠니(현재의 센다이 지역) 야나가와번으로 이봉[각주:3]하고 번의 영지를 막부의 직할로 두었으나, 1821년 다시 반환하면서 지배권과 함께 북방 경비를 위임함.

하지만 1854년 미일친화조약이 체결되어 하코다테가 개항됨에 따라 다시 한 번 에조치의 중요성이 높아지며 동부 영지 일대가 다시 막부로 반납되었으며, 1868년 메이지 정부는 에조치에 하코다테 재판소를 설치하며 여러 외국과의 교섭 등 막부의 북방 정책의 거점으로 삼음.


국가의 모든 정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에도막부는 19세기 후반 외국의 개항 압박에 대한 미숙한 대처와 '존황양이[각주:4]' 사상의 대두로 혼란기에 접어들었고, 1867년 사츠마 번과 조슈 번이 에도막부 타도를 위한 동맹을 맺게되는 등 일련의 사건과 함께 막부의 전제 정치에 대한 민중과 다이묘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그 기반이 붕괴될 조짐을 보임.

시코쿠 남부를 지배하던 도사 번은 사츠마 번과 조슈번의 동맹을 견제하여 신정권을 수립하고자 에도막부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주라'고 권고하는 타협안을 제시하게 되고, 힘이 약해진 쇼군은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뒤에도 새로운 정치체제 아래에서 권력을 장악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 방안을 수용.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7년 11월 9일 천황에게 통치권 반환을 신청하고, 다음 날 천황이 이를 허가하며 12세기 부터 19세기 까지 이어져 온 쇼군 중심의 봉건제도 사회, 일본의 군부 정권이 무너지며 메이지유신이 완성되는데, 이 정치적 사건을 '대정봉환(大政奉還)[각주:5]'이라고 함.


                               보신전쟁 당시의 사무라이들


범(汎) 친(親) 에도막부 세력(도쿠가와 막부, 에조 공화국[각주:6], 오우에쓰 열번 동맹)은 대정봉환에 불복하며 일본 전역을 아우르는 내란인 '보신전쟁[각주:7]'을 일으켰지만, 사츠마번, 조슈번, 도사번을 주축으로 한 신정부군에 의해 토벌됨.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와 함께 일본제국의 수립을 선언하였고, 1868년 5월 3일 에도는 일본제국군의 손에 떨어 지게 되었으며, 도쿠가와 막부는 결국 붕괴.


1869년 에조치는 '홋카이도[각주:8] [각주:9]'로 개칭되며 본격적인 개척이 시작됨. 1886년 통일된 행정기관으로 홋카이도청이 만들어지고,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 의해 많은 일본인들이 이주되었으며, 석탄이 발견되면서 수많은 탄광이 개발되어 이를 수송하기 위한 철도가 종-횡으로 설치됨. 이 '개척'은 아이누족의 토지 수탈, 강제 이주가 수반되어야 했기 때문에 "일본제국에 의한 침략[각주:10]"이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음.


1950년 홋카이도를 개발하기 위해 조사·입안 및 실시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홋카이도 개발청이 총리부의 외국으로서 설치되었으며, 홋카이도 내에는 홋카이도 개발국과 각 지방에 개발 건설부가 놓여 개발에 임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돌아온 병사와 구 식민지로부터의 귀환자의 정착지로서 홋카이도가 주목받아 인구가 급증했고, 전후 부흥과 고도 경제성장기 초에는 홋카이도의 석탄이 귀중한 보물이 되어 많은 탄광 노동자가 홋카이도에서 살았지만, 1960년대에 석유로의 에너지 전환이 일어나 1980년대 까지 대부분의 탄광이 폐광됨.




부록 : 북방 4도(+쿠릴열도) 이야기

출처 : 지금은 사라진 Yahoo Blog의 ppao2님의 포스트 + 위키피디아


글을 읽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 쿠릴 열도와 북방 4도는 다름.

쿠릴 열도는 캄차카 반도에서 홋카이도로 이어지는 모든 섬,

북방 4도는 쿠릴 열도 중 홋카이도와 가까운 구나시리, 에토로후, 시코탄, 하보마이 제도(군도)를 지칭함.


북방 4도의 존재는 에도시대(1603~1868) 이전 부터 알고 있었으나, 1786년 에도막부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모가미 토쿠나이(最上徳内)'를 보내 홋카이도 동부와 사할린, 구나시리, 에토로후 등의 지역을 조사하면서 정확히 파악하게 됨. 에토로후에는 이미 러시아 사람들 일부가 진출해 있었으나, 일본인들의 진출이 점차 늘어나면서 1855년 일본과 러시아 간의 영토 범위를 협의하는 러일화친조약[각주:11]을 맺게 됨.

하지만 이 조약에서 공동관리구역으로 둔 사할린(가라후토)에는 일본과 러시아 양쪽이 모두 진출해 두 국가가 공존하는 상태가 되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1875년 사할린 전체를 러시아가 지배하는 대신 쿠릴열도 전체를 일본측에 할양한다는 내용의 상트페테부르쿠조약을 체결함.

일본은 당시 개발 진행중이던 홋카이도가 사할린의 영유권 보다 먼저였고, 쿠릴 열도의 18개 섬을 일본 영토로 만들 수 있었으므로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


이 후 러일전쟁(1905년) 말기 쓰시마 해전[각주:12]에서 승리한 일본이 사할린 전체를 점령하게 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이 중재한 포츠머스조약[각주:13]을 통해 북위 50도선 남쪽의 사할린 섬 절반을 러시아로 부터 할양 받게 되었으며, 1945년 까지 사할린 섬 남부와 캄차카 반도 바로 앞의 쿠릴열도 전체가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오게 됨.


그러나 1945년 2차대전에서 패한 일본이 센프란시스코조약을 통해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 조건'으로 '쿠릴열도와 사할린 남부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것'에 서명하면서 사할린과 쿠릴열도는 소련(러시아)의 영토가 되었고,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역시 일본의 통치 범위 밖으로 지정함.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중 2장 2항의 '영토 포기 또는 신탁 통치 이관'에 관한 내용


①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자격, 영유권을 포기한다.

② 일본은 대만과 펑후 제도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다.

 일본은 쿠릴 열도와 사할린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다.

④ 남태평양의 구 위임통치지역은 미국이 신탁통치하며,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의 신탁통치 예정지역으로 삼는다.

⑤ 일본은 일체의 국외 자산과 조약체결국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한다.


센프란시스코 조약 초안 단계에서 '일본이 포기할 쿠릴 열도'가 어디까지 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구나시리와 에토로후가 쿠릴 열도에 포함되지 않으며 일본 영토로 남는다고 주장했으나, 일본 정부는 구나시리와 에토로후 섬 까지 쿠릴 열도에 포함된다는 내용의 답변을 했고, 영국과 프랑스 역시 일본 정부와 동일한 입장을 표명함.


하지만 소련은 2차대전 종료 직전 일본과의 불가침조약[각주:14]을 깨고 이 섬들을 이미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중국[각주:15]이 평화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센프란시스코조약에 서명하지 않음.


당시 북방 4도 지역에는 약 1만7천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으나 소련과의 합의에 따라 1949년 까지 본토로 귀환됨. 하지만 이 때 일본 국적을 박탈당한 한국인들은 귀환 대상에서 제외되어 그대로 남거나 사할린 섬으로 이주해 냉전 당시 억류 한국인 문제의 불씨가 됨.

일본은 1956년 소련과의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센프란시스코조약에서 소련이 서명하지 않은것을 근거로 북방 4도를 포함한 쿠릴열도 전체와 사할린 남부까지 일본에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고, 회담을 거듭한 끝에 소련측이 하보마이 제도와 시코탄 섬을 반환하는 것으로 합의[각주:16]. 하지만 소련과 냉전중인 미국이 개입해 구나시리, 에토로후의 반환까지 요구하지 않으면 오키나와를 영구히 일본에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 정부를 압박했고, 결국 시코탄, 하보마이를 반환할 것이라는 공동선언문에 그치게 됨.



결국 일본과 소련의 국교는 정상화 되었지만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않았고, 1961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실시한 것에 반발한 소련의 흐루시쵸프가 "영토 문제는 끝났다"고 발언하며 하보마이와 시코탄을 넘겨주기로한 제안을 취소하게 되었으며, 이 후 부터 일본은 에토로후와 구나시리 섬 까지 반환을 요구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꿈.

이후 고르바초프 정권에서 1956년의 공동선언을 존중하는 태도로 바뀌면서 일본에게 시코탄과 하보마이의 반환에 대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으나, 일본 측에서 4도 전체 반환을 요구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협상이 되지 않음.


현재 일본 정부는 시코탄, 하보마이 뿐 만 아니라 4도를 일괄 반환 받는 것을 공식 견해로 하고 있으나, 정치가들 사이에서는 2도 만이라도 먼저 반환 받을 것을 주장하는 2도 선 반환론, 2도만 받고 끝내자는 2도 반환론, 최근에는 북방 4도의 면적을 절반으로 나눠서 가지는 것은 어떠냐고 주장까지 있음.


러시아는 일관되게 시코탄, 하보마이를 반환하면 최종적으로 결착이 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으나, 최근에는 2도 반환 조차도 비판적. 소련과 러시아의 경제가 어려웠을 시기에는 북방 4도 주민들이 경제대국인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을 원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전망도 있었으나, 요즘은 러시아의 경기가 매우 좋기 때문에 시코탄, 하보마이에 거주하는 러시아 사람들도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을 찬성하지 않음.


이 섬들의 인구 증가(현재 북방 4도에는 약 1만7천명의 러시아 주민이 거주 중)와 발전에 따라 현실적으로 점점 반환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고, 일본 정부도 반환 후의 주민들에 대한 정책을 전혀 내놓지 않고 있으므로 진짜로 북방 영토를 되찾을 생각이 있는지 의문시하는 견해도 있음.


지도에서 북방 4도의 면적을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모두 합치면 5,036로 경기도의 절반 크기로 무시할 수 없는 면적이며, 영해의 중요성도 있으므로 일본으로서는 포기하기 쉽지 않을것.


황당한 마무리를 하자면,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했기 때문에 사할린 남부와 북방 4도 이외의 쿠릴 열도는 일본의 통치 범위에서 제외되지만, 소련은 조약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소련)의 지배 역시 국제법상 인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어느 미친 우익의 주장같지만- 일본의 공식적인 견해. 때문에 일본에서 판매되는 지도를 보면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 섬 남부와 에토로후 섬 이북의 쿠릴 열도는 러시아 땅이 아닌 '귀속 미정 지역'으로 취급되어 공백으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고 북방 4도는 일본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음.(아래 지도 참조)





아이누 이야기


01


홋카이도 섬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은 외모나 풍습이 다른 일본인들과 뚜렷하게 구별되어 그 기원과 원(原) 일본인과의 관계 등이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옴.

전통적인 아이누인들은 몸과 얼굴에 털이 많으며 눈이 깊고 코가 오뚝하여 얼굴의 윤곽이 또렷하고, 미간이 좁고 눈썹의 길이가 매우 길며 대부분 쌍꺼풀을 가지고 있는 등 얼굴이 편평한 몽골로이드(Mongoloid)의 일반적인 외모와는 다르기 때문에 한때 코카소이드(Caucasoid)[각주:17]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아이누 백인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으며, 다른 일본인과 인종적으로 구분된다는 이러한 사고는 메이지 이후 일본 정부의 민족 말살적인 동화 정책의 기초가 됨.


최근에는 DNA 분석 등으로 아이누와 원(原) 일본인과의 관계가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오늘날에는 아이누를 '북방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랭지 적응을 하지 않은 고(古) 몽골로이드'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남방계 몽골로이드의 일부가 북으로 이동을 시작해 오랫동안 오키나와와 일본 열도에 정착해 조몬문화의 주역이 되었다가 북방계 몽골로이드(야요이 인)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는데, 야요이(彌生) 인들과 동화된 것이 후대의 일본인이고, 동화되지 않은 채 동북 방면으로 옮겨가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것이 아이누의 기원이라는 주장도 있음.

이처럼 오늘날에는 아이누가 다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고(古) 몽골로이드를 조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의 신체적 특징 역시 현재까지 고(古) 몽골로이드의 특징을 많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유력한 학설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으며 각 학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 자료들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


                              1904년에 찍은 아이누족의 모습


15~18세기만 해도 아이누인들은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캄차카(Kamchatka) 반도의 남부, 북쪽으로는 사할린의 남부, 남쪽으로는 일본 혼슈의 동북부 지역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었고, 사할린의 북쪽이나 헤이룽강(黑龍江) 유역, 캄차카 반도까지 교역을 하고 있었다고 함.

주거의 분포에 따라 '홋카이도 아이누'와 '사할린(樺太) 아이누', '쿠릴열도(千島) 아이누'로 나뉘는데,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아이누는 북방 민족이나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홋카이도의 아이누와는 문화적 차이를 나타내지만, 강제 이주 등으로 오늘날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홋카이도의 아이누도 급격한 인구 감소와 민족 정체성의 상실 위기를 겪고있음.


근대 이후 일본 정부와 사회는 아이누의 문화와 전통을 미개(未開)시하고 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켜야 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는데,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 개척 과정에서 강제 이주, 토지 약탈, 전통적 생활 관습을 금지하는 등, 오랜 기간 독특한 문화를 가꾸어왔던 아이누의 전통 문화를 파괴, 억압, 차별함.



02


1869년 하코다테의 고료카쿠[각주:18]로 도망친 에노모토 다케아키[각주:19] 이하의 막부 잔당을 제압한 신정부는 같은 해 개척사(후의 홋카이도청)를 설치하고, 1873년 '지조개정령'에 의해 아이누모시리[각주:20]를 천황의 재산으로 편입한 후, 민간에게 대부분을 불하[각주:21]함. 땅의 사유 개념이 없는 아이누 민족의 사지를 고대 부터의 침략자인 덴노가 다루어 일부 재벌에게 불하했던 것이며, 현재 홋카이도에 '미츠이'의 토지나 사유림이 많이 존재하는 이유가 이때의 불하 때문이라고 함.


또, 신(덴노) 체제 정부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개척사로 보내 러시아를 의식한 북변 방위를 담당하게 하는데, 이는 15년 전쟁[각주:22] 중 중국 동북부(만주)에 개척단을 보내 대소 방위에 임하게 하고, 막상 소련군이 공격해 왔을 때에는 군대만 도망쳐 왔을 때의 발상과 비슷함. (쉽게 말해 총알받이로 이용했다는 이야기)


아이누를 '일본'에 편입한 메이지 정부는 철저한 동화 정책을 취했고, 아이누의 전통적인 풍속·습관을 금지해 성씨 개명을 실시하게 함. (후의 조선 지배의 원형)

몇 안 되는 어장과 농지가 주어졌지만, 토지의 사유 개념이 없고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아이누에게 나눠진 재산은 일본인들의 먹이감이 됐으며,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계약을 하게 하는 방식은 청부제[각주:23]가 시작된 이후 자주 사용되었음.


이런 상황에서 1899년 '홋카이도 구토인 보호법'이 만들어졌으나, 차별 의식으로 가득 찬 이 법률로 실제 구해진 아이누는 없었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농업에 종사하거나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1만 평 이내의 사지가 급부됐지만, 이 토지는 산속이나 황무지 등 경지로는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으며, 위에서 얘기한 것 처럼 토지 소유의 개념과 문자가 없는 아이누인들에게는 그것을 신청하는 것 조차 힘들었던 것. 게다가 15년간 개간하지 않으면 몰수되는 규정이 있어 알지 못하는 동안에 토지를 빼앗기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며, 심지어 2차대전 패전 후 농지 개혁에 의해서 급부된 토지조차 빼앗아 버렸다고 함.

이렇게 마음대로 법률이라고 하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수탈하는 병합 방식은 조선 병합과도 유사점이 많음.

원래 수렵 민족인 아이누 민족은 다이와 민족처럼 농업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지로는 부적합한 땅을 변변한 기술 지도 조차 없이 억지로 개간하고 밭을 경작하도록 만든 것.



03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파시즘이 대두해 황민화 교육[각주:24]이 시행되면서, 아이누 문화는 뒤떨어진 것으로서 취급되고 차별되어 민족 말살의 정도가 더욱 강해지는데, '천황의 국가에서 차별받는 사람이 그 고통을 극복하려면, 일본인 이상으로 '충성도 높은 신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제적으로 요구받게 됨.

1945년 미군 상륙으로 일본군의 전세가 불리해 지자 오키나와 마을 주민들이 집단 자살한(집단 자살시킨) '도키시키 사건'이나, 2차대전 중 미국의 일본계 2세 부대의 활약, 베트남 전쟁중의 흑인도 이와 유사한 형태.


2차대전 패전 후 농지 개혁으로 아이누의 토지를 빼앗는 등, 샤모[각주:25]에 의한 아이누의 수탈은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음.

고도 경제성장기에는 '토마코마이 동부 개발 계획'에 의해 그나마 조금 남은 땅 까지도 빼앗았고, 현재도 이권을 고집하는 공무원과 기업이 일체가 되어 아이누의 성지인 비라토리쵸·니부타니를 댐의 바닥에 가라앉힘.


고대 천황제 국가로 시작해, 그 후 무신 정권, 그리고 메이지 이후의 근대 자본주의국가에 이르기까지, 쉬는 일 없이 행해지고 있는 아이누 침략 역사에 대해 현대의 샤모의 자각이 필요함.


일본 아이누문화진흥법 시행 10년을 맞은 2007년, 아이누 민족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홋카이도 거주 아이누 민족이 조직한 홋카이도 우타리(동포) 협회의 가토 다다시(加藤忠) 이사장은 도쿄(東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헌법 개정 논의에서 아이누민족의 권리가 명기될 수 있도록 노력할 방침"이라고 밝히고, "일본정부는 아이누민족을 선주(先住) 민족으로 인정해야 한다"며 "헌법에 '아이누 민족'이라는 문구가 들어가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공적인 차별 현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

일본은 메이지(明治)시대 이래 홋카이도 구토인(舊土人)보호법 등을 토대로 아이누민족의 토지와 문화를 강탈했고, 열등민족 취급을 받았던 아이누민족은 사회적 약자로 전락했으며, 심한 차별과 편견 속에서 고통받음. 1997년 뒤늦게 아이누문화진흥법이 제정되면서 아이누인과 문화에 대한 인식이 개선돼 왔지만 아직도 차별과 편견은 뿌리깊게 남아 있으며, 가토 이사장의 헌법 명기 요구는 아이누민족의 사회적 권리회복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


일본 정부는 아이누민족의 독자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으나, 정치적인 분리ㆍ독립과 토지 반환, 보상 요구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선주권을 의식해 선주 민족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음. 일본 정치권의 인식은 아이누민족이 이미 (일본인으로) 동화됐으며, 일본은 단일민족에 가깝다는 의견.


공식적으로 인정된 일본 내의 아이누족은 약 2만 5천 명이지만, 극심한 차별 때문에 아이누족임을 숨기거나 인종차별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부모가 알려주지 않아 아이누족 출신임을 모르는 경우도 있어서 정확하지는 않으며, 비공식적으로는 20만 명까지 추산되기도 함. (러시아에는 약 5만 명이 살고 있음.)





출처 : 위키피디아의 많은 글들 (부록 제외)


  1. 오대로(五大老): 일본 센고쿠 시대, 토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가장 유력한 권력을 가진 다섯 명의 다이묘. 히데요시가 생전에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게 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며, 원 취지는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호시탐탐 기회를 넘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한 방안이었음. [본문으로]
  2. 번(藩): 일본의 역사에서 제후(諸候-일정한 영토를 다스리는 작위)가 다스리는 영지를 가리키는 말로, 1만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보유한 봉건 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한 영역과 그 지배기구를 가리키는 역사용어로 사용됨. (1석=성인 1명이 1년 동안 먹는 양의 쌀) [본문으로]
  3. 이봉: 제후(諸侯)의 영토를 다른 곳으로 옮김. [본문으로]
  4. 존황양이(尊王攘夷): 천황의 고대적 권위에 기초해 황실을 군신 관계의 최고의 표현으로서 존중하는 사상과 유학의 화이(華夷)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에도 말기 외국과의 통상에 반대하고 외국의 격퇴를 주장하는 봉건사상이 합쳐진 사상. [본문으로]
  5. 대정봉환(大政奉還): 도쿠가와 막부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는 것을 선언한 정치적 사건. [본문으로]
  6. 에조 공화국(蝦夷共和國): 1869년 1월 대정봉환에 불복한 에도막부 세력이 모여 하코다테를 수도로 하는 에조공화국을 건국하였으나, 그 해 5월 18일 보신전쟁(하코다테 전쟁)이 끝나면서 소멸됨. 정부 조직은 미국을 본땄으며, 에도막부의 신하들을 위한 개척지로 삼음. 당시 선거로 통령을 선출한 것을 들어 에조 공화국이야말로 일본의 민주주의 시발점이었다는 일부 학자들의 의견도 있다고 함. [본문으로]
  7. 보신전쟁(戊辰戦争): 1868년 부터 1869년 사이에 일본에서 일어난 일련의 내란으로, 한자를 음역해 무진 전쟁(戊辰戰爭)으로 부르기도 함. [본문으로]
  8. 홋카이도 개칭: 7세기 후반에 성립된 *고키시치도의 사이카이도, 난카이도, 도카이도 등의 도 이름을 모방한 것으로, 에도 막부 말기에 에조치를 탐험한 마쓰우라 다케시로가 명명자로 알려져 있음. 그는 '홋카이(北加伊)', '가이호쿠(海北)', '가이토(海島)', '도호쿠(東北)', '지시마(千島)', '히다카미(日高見)'의 6가지 후보를 제안했는데, 의견서를 통해 '가이(加伊)'는 선주민인 아이누인들이 이 섬을 부르는 명칭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 가이를 같은 발음의 '가이(海)'로 바꾸어 고키시치도의 명칭을 모방해 '홋카이도(北海道)'로 정했다고 함. 하지만 아이누어 학자였던 긴다이치 교스케(金田一京助)는 아이누어에 '카이(カイ)'라는 단어가 없다는 점을 들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 따라서 '카이'(カイ)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음. 일본 동북 지역에는 지금도 아이누 언어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이 남아있는데, 홋카이도에는 특히 많아서 삿포로, 왓카나이, 오타루, 토마코마이 같은 주요 도시들의 이름이 모두 아이누 언어에서 유래. (미국 중서부의 지명들이 인디언 언어에서 유래한 것과 흡사.) [본문으로]
  9. 고키시치도(五畿七道): 아스카 시대부터 사용된 일본의 옛 광역 행정 구역으로, 기나이의 다섯 '*구니'(国-일본의 옛 행정 구역 단위로, 나라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지리 구분에서 기본 단위로 사용됨)와 일곱 '도(道)'라는 뜻. 무로마치 시대 이후에는 행정 구역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지역 이름으로는 계속 사용됨. [본문으로]
  10.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는 아이누족의 신화와 생활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함. [본문으로]
  11. 이때 정한 경계선이 에토로후 섬과 우룻푸 섬의 사이였으며, 이 조약은 현재까지 일본이 에토로후 섬 까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음 [본문으로]
  12. 쓰시마 해전(日本海海戦, Цусимское сражение): 1905년 러일 전쟁 중 쓰시마 섬 부근 바다에서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발트해 함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노급전함을 주력으로 한 함대가 정면으로 격돌한 최대의 해전으로, 일본 해군이 승리하고고, 러시아 발트해 함대는 전멸. 일본에서는 일본해 해전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동해 해전이라 부름. 이후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음. [본문으로]
  13. 포츠머스조약의 주요 내용: (1)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또 조선에 대해 지도·보호·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2) 러·일 양군은 랴오둥 반도 이외의 만주 지역에서 철수하며 만주에서 청나라의 주권과 기회균등 원칙을 준수한다. (3) 러시아 정부는 청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 랴오둥 반도(뤼순, 다롄) 조차권, 창춘-뤼순 간의 철도, 그 지선,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모든 권리와 특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4) 양국은 만주의 철도들을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경영한다. 단 랴오둥 반도 지역은 예외로 한다. (5) 일본이 배상금을 청구 하지 않는 대신,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 섬, 그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비무장지역으로 하며, 소오야(宗谷), 타타르(Tatar) 해협의 자유 항행을 보장한다. (6) 동해·오호츠크 해·베링 해의 러시아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인에게 허용한다. ///// 국제 사회는 (1) 조항으로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공인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 권익을 인정한 것일뿐 한국 병합을 용인한 것은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다. (2)~(4) 조항은 러시아와 일본이 하얼빈을 경계로 만주를 남북으로 분할한다는 말이 된다. [본문으로]
  14. 2차대전 중 일본과 소련은 1946년까지 중립 조약을 체결했는데, 소련이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을 침략한 것은 조약위반이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도쿄재판에서 불가침 조약 자체가 불성실한 것이었고 소련 참전은 미국측이 요청했기 때문에 소련의 대일 선전 포고는 정당한 것이었다고 최종 판결되었음. [본문으로]
  15. 2차대전 종료 시점 연합국의 주요 일원이었던 장개석의 중화민국 정부는 모택동에게 밀려 대만으로 쫓겨난 상태였고, 연합국 대표 일원인 중국 대표가 중화민국 정부인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인지 연합국 간의 의견이 엇갈리는 상태에서 결국 중국 대표의 서명은 이루어지지 않음. (미국은 타이완에 있는 중화민국을 중국 대표로 초청하기를 원했지만, 영국은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로 초청하길 원했고, 그에 대한 타협안(?)으로 어떤 정부도 초청되지 못했음) [본문으로]
  16. 아래 지도를 보면 구나시리, 에토로후 두 섬은 캄차카 반도에서 홋카이도로 이어지는 쿠릴열도의 한 부분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하보마이 제도와 시코탄은 이 섬들보다 남쪽에 있고 홋카이도의 동쪽 끝에 있는 네무로 반도의 끝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쿠릴 열도의 일부가 아닌 홋카이도의 일부라고 해석 하는 것도 가능. [본문으로]
  17. 코카서스인종: 유럽을 중심으로 북아메리카·서아시아에 사는 인류집단 [본문으로]
  18. 고료카쿠(五稜郭): 에도 시대 말기에 세워진 지금의 홋카이도 하코다테 시에 있는 요새로, 하코다테의 유명 관광지. [본문으로]
  19.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에조공화국을 건국한 인물로 보신전쟁에서 마지막 까지 저항했으나, 항복 후 메이지 정부의 편에서 일함. [본문으로]
  20. 아이누모시리: 아이누 사람들이 홋카이도를 부르는 말로,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뜻. [본문으로]
  21. 불하: 국가나 공공 단체의 재산을 민간에 팔아넘김. [본문으로]
  22. 15년 전쟁: 1931년 9월 만주사변부터 1945년 8월15일 패전까지의 전쟁 [본문으로]
  23. 청부제(위탁경영): 부도난 기업이 법정 관리를 신청하면 기업의 경영권은 법정 관리가 끝날 때까지 법원에 넘어가는데, 이때 법원을 대리하여 선정된 대리인이 회사가 정상화되어 제삼자에게 인수될 때까지 대신 경영하는 제도. [본문으로]
  24. 황민화 교육: 일본 및 그 식민지에서 주민들에게 일본 천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교육 정책. [본문으로]
  25. 샤모: 아이누인들이 일본인을 부르는 호칭. [본문으로]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산기의 M+ M- MRC 버튼  (2) 2013.06.19
대한민국 종교 인구 통계  (0) 2013.05.27
아프리카가 가난한 이유  (0) 2012.12.30
이 나라 근대사의 진실  (0) 2009.09.03
우리가 알고있는 엉터리 세계지도  (0) 2009.09.03
Posted by kanwa
:

2005년 자료가 마지막. 10년 주기로 조사한다고 함.

인구 및 주택 센서스 자료인 걸로 보아, 인구 조사할 때 같이 하는 모양.



불교 22.8%

개신교 18.3%

천주교 10.9%

무교 46.5%



총괄 종합 통계



종교별 교세 증감 현황



행정구역별 각 종단 인구


재밌는 점 한 가지는 불교와 개신교의 비율이 2013 대선처럼 갈린 것.

수도권과 전라도 지역은 개신교 우세, 나머지는 불교 우세. 보수층 중에는 불교가 많고, 진보층은 개신교가 좀더 많고. 천주교는 중도 정도로 보면 될 듯. (특히 부산, 경남 사람들의 불심이 장난이 아님. :-)



최근 20년 간 한국의 주요 종교 인구 변화


20년간 전체 종교 인구는 770만명 증가했는데,

그 중 불교는 260만명, 개신교는 210만명 증가. 천주교는 약 330만명이 증가해 전체 증가폭의 절반에 가까운 파이를 차지.


'개독'으로 불릴만큼 왕성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에 비해 개신교의 증가폭이 작으며, 1995년 대비 오히려 줄어들었음. 

이미지 관리를 해야할 때인 듯 하나, 아직 전체 인구의 46%는 무교라고 하니 이미지고 나발이고 개신교의 선교 활동은 절대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예상. orz (이러다 천주교에 뒤집혀 3위 될라.)


있는 듯 없는 듯 한 불교는 꾸준한 상승으로 대한민국 대표 종교 타이틀 유지.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산기의 M+ M- MRC 버튼  (2) 2013.06.19
홋카이도와 아이누 이야기  (0) 2013.06.17
아프리카가 가난한 이유  (0) 2012.12.30
이 나라 근대사의 진실  (0) 2009.09.03
우리가 알고있는 엉터리 세계지도  (0) 2009.09.03
Posted by kanwa
:

임시조치된 글입니다

공부 2013. 5. 9. 23:52 |
notice"해당 글은 권리침해신고에 의해 임시조치된 글입니다."
:



01.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유독 직선이 많음.

과거 제국주의 시절 유럽의 국가들이 종족과 문화 등을 고려하지 않은채 책상에 앉아 지도만 펼쳐놓고 정치적인 흥정에 의해 국경선을 그으면서, 원래 이어져 있던 정치적인 세력이 나뉘거나 전혀 다른 집단이 묶이는 결과 초래. 그렇다 보니 종족 간의 갈등이 내전으로 확장되는 경우가 빈번.

대표적인 것이 르완다 학살.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르완다는 85%의 후투족과 15%의 투치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벨기에가 15%의 투치족을 식민지의 지배 계층으로 만들면서 종족간의 탄압과 갈등을 부채질.

수단의 경우 종교와 인종적으로 완전히 다른 남수단과 북수단을 하나의 나라로 만들면서 갈등 발생. (현재는 분리)

나이지리아의 경우 200개가 넘는 부족을 한 국가로 만듬. 당연히 국가 정체성이라는 것이 없으며 부족 중심 사고.


02.

제국주의 시대가 끝났지만 아직도 유럽, 미국 등 서구 강대국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문제. 2차 대전 후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하게 되었지만 이 독립은 단지 서류적인 독립. 서구 열강들은 안보와 평화유지라는 명목으로 자국 부대를 배치해 놓고 정치와 경제를 직, 간접적으로 통제함. 모든 천연 자원이 유럽 시장에 공급되었고, 그들의 허락 없이는 다른 어떤 나라와도 거래할 수 없었으며, 이에 반발하는 정치적 불만 세력의 활동은 계속 억눌림.

아프리카에는 아직도 천연 자원이 많지만 자국이 아닌 서구 회사들에게 이권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 8~90%는 서구 기업들에게 빼앗기고 있으며, 나머지도 정치인들의 부정부폐 등으로 자국의 경제 성장이나 사회간접자본에 투자로 이어지는 사례가 거의 없음.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으니 반정부 세력 출현, 쿠테타 등의 가능성이 높아지며, 천연 자원의 경우 반정부 세력이 수탈하기 쉽기 때문에, 수탈한 자원을 팔아 무기를 구입해 내전을 하는 악순환이 계속 되는 상황. 정부의 악정과 종족간의 갈등으로 시작된 전쟁이 자원을 둘러싼 전쟁으로 번짐.

기본 경제를 천연자원에 의존하고 제대로 분배가 안되기 때문에 지속적인 성장이 불가능하며, 전반적인 산업 불균형으로 생산 부진, 대량 실업자 양산 등으로 사회 불안에도 영향을 끼침. 이런 악순환으로 발생된 실업자들이 대거 무장 단체로 흘러 들어가기도 함.


03.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은 정부와 저항세력을 막론하고 자국의 지정학적 우위를 위해 모든 가능한 형태를 동원해 군사적 지원. 앙골라, 에티오피아, 모잠비크, 소말리아 등은 이 두 강대국의 지원을 통해 장기간의 내전을 벌임. 한 조사에 의하면 외부 요인이 없는 내전의 경우 1.5년 만에 종결됐지만, 외부 세력이 내전에 개입되면 평균 9년 동안 전쟁이 지속되었음. 갈등을 부채질하고, 오래되고 낡은 무기와 광물, 석유 등의 자원을 바꾸는 형태의 이 개입은 아프리카를 피바다로 만드는 결적적인 역할을 하지만 지금까지 선진국들은 분쟁지역 무기 판매에 대한 어떤 규제도 행하지 않고 있음.

(이는 우리 나라도 자유롭지 않다. 국내 업체인 S&T모티브는 1996년 나이지리아, 2003년 세네갈에 K2 소총을 소규모 공급한 것을 시작으로 얼마 전에는 말라위에 K2 소총 1100정과 신형 K2 카빈 소총 1,000정을 공급하면서 아프리카 신흥시장의 방위산업 진출에도 더욱 활기를 띨 것이라는 뉴스를 전했다. 말라위 군이 UN 평화유지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지만, 무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뒤바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04.

이런 내전과 각종 기근으로 인해 수많은 고아들이 발생하는데, 국제노동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5~14세의 아프리카 어린이 8천 만 명이 중동 지역에서 노예로 일하고 있음. 무장 단체에 징집되어 소년병이 되는 경우도 빈번한데, 검문소 등에서 성인 병사 앞에 세워져 총알 받이로 쓰이고 있다고 함. 이는 오랜 전쟁으로 성인 남성의 인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06.

각종 질병 역시 제국주의 시절 유럽인들이 진출하면서 발생된 것. 병원균들이 아프리카의 무덥고 비위생적인 환경과 어우러지면서 각종 질병 발생. 에이즈의 경우 발생 빈도가 정부에서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국제 기구의 원조에만 의지하는 상황.


07.

수렵과 농경 생활을 하던 아프리카인들에게 가뭄은 치명적.

온난화와 같은 이상 이변으로 오래 전 부터 대륙 전체에 걸쳐 가뭄이 지속. 사하라 사막은 해마다 조금씩 넓어지고 있음. 에티오피아의 경우 기원전 수 천 년 전에는 유럽과 동아시아를 초월하는 거대 왕국이 건설된 적도 있었으나, 식민 시절을 거치면서 기존의 밭, 밀림, 초원 등 모든 지역이 유럽 시장에 커피, 카카오, 사탕수수 등을 공급하기 위한 대규모 농작지로 바뀌고, 국가 전체가 단일 작물을 재배하는 거대 농장화. 이로 인해 일반 곡물과 공산품의 가격이 폭등하는 등 자생적인 경제 기틀이 파괴됨. 수 십년 전 까지만 해도 아비시니아 고원의 시원한 날씨 덕분에 초목이 무성했었으나 인구 증가(후진국의 특성)에 따른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분별한 개간, 방목으로 황폐화.


08.

아프리카에 내전이 끊이지 않는 원인의 핵심은 부족간의 갈등 보다 서구 강대국 들의 이권 때문이 큼.

대규모 농장들과 하청 관계를 맺고 있는 서구 자본은 아프리카에서 자신들에 대한 단일화 된 저항 세력이 자리잡지 않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내전을 부추기고 있으며, 서구 군수산업체 역시 각 군벌들에게 무기를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음. (스타벅스가 이스라엘의 군수산업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절대 우연이 아님.)


09.

지금은 한중일 동북아 국가들도 앞장서서 아프리카에 공짜로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지어주며, 제2의 약탈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






아프리카가 가난한 이유는 아프리카의 밖에서 찾아야 하며, 해결 방법 역시 밖에서 찾아야 한다.


아프리카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는 우리도 간접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카카오, 커피, 사탕수수, 땅콩 같은 농산물은 물론이고, 전세계 광물 자원의 1/3이 이 땅에 묻혀 있으니 무관할 수가 없고, 제2의 합법적인 약탈자가 되기 위해 지금 이시간에도 땀흘리고 있는 애국자 들이 있으니.


아프리카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는 쇼킹 아시아 같은 문화적 충격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눈물이라는 감정의 형태로 억지 감동을 이끌어 낸 것일 뿐, 그들이 흘리는 진정한 눈물은 따로 있는 것이다.

원시적인 문화와 생활로 인한 아픔은 문명의 눈으로 봤을 때 인권이 어쩌고 저쩌고일 뿐 오히려 그들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그 보다는 전쟁, 질병, 착취로 인해 그들의 문화가 파괴되고 자급자족 경제가 유지되지 않는 것이 더 큰 고통이고 그 원인을 제공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일 수 있음이 마음아프다.


사실, 해결 방법은 너무나 명확하고 간단한데, 돈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이 명확하고 간단한 방법이 적용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로 알고 문제 의식을 갖는 사람이 많아질 수록 점점 희망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훈훈한 생각으로 마무리를 해본다.



출처 : 위키피디아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산기의 M+ M- MRC 버튼  (2) 2013.06.19
홋카이도와 아이누 이야기  (0) 2013.06.17
대한민국 종교 인구 통계  (0) 2013.05.27
이 나라 근대사의 진실  (0) 2009.09.03
우리가 알고있는 엉터리 세계지도  (0) 2009.09.03
Posted by kanwa
: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여기에 스즈키라는 악질 고등계 형사가 나오는데요, 이 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죽입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에게 불량선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누명을 씌우기도 합니다. 정말 보면서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질 정도로 증오스러운 놈입니다. 주인공인 하림 역시 스즈키에게 가족을 잃은 희생자 중 한 명이었지요. 스즈키는 하림 역시 엮어 넣으려고 계속 괴롭힙니다. 그러던 중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하림은 징병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미군 특수부대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합니다.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해방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하림은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하림은 어느날 경찰서에 들렀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합니다. 경찰서에서 여전히 부하들을 호령하고 있는 스즈키를 발견한 겁니다. 눈이 돌아간 하림은 뛰어가 스즈키의 멱살을 잡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소리를 지릅니다.


"스즈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해방이 되었어!!! 스즈키!"


멱살을 잡힌 스즈키는 부하들을 시켜 하림을 끌어 내라고 합니다. 하림은 무력하게 경찰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비명을 지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스즈키는 침을 뱉듯 말합니다.


"저런, 빨갱이 새끼."


 "여명의 눈동자"에서 이 장면은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친일파는 해방이 되어도 처벌받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빨갱이로 몰려 두들겨 맞습니다. 해방이 되었지만 세상이 바뀌지 않은 겁니다. 문제는 이게 그냥 드라마의 극적 구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국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라는 겁니다.


미군정을 뒤에 업은 이승만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친일파를 모두 흡수합니다. 세상이 뒤집히고 처벌이 될까 두려워 덜덜 떨던 조선총독부의 관료들, 경찰들은 살기 위해 이승만에게 가서 붙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납니다. 
친일파들의 살길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빨갱이'를 입에 달고 삽니다. 빨갱이가 쳐들어온다, 빨갱이가 우리를 죽이려 한다, 우리가 빨갱이로부터 너희를 지켜주겠다. 


그렇게 친일파는 식민지 시대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건국의 공로자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승만 독재 시대에 승승장구하던 그들은 그러나 다시 한번 위기를 맞습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들은 두려움에 떱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박정희에 의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친일파들에게 다시 살길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박정희의 공화당에 투신합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자신이 일제시대 친일파입니다.  일본 육사 졸업하며 천황한테 혈서 쓰고 자랑스러운 황국신민으로 공인받은 자이니까요. 그리고 박정희의 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박정희는 헌법 개정을 통해 자기가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국회? 그까짓 거 필요없습니다. 해산시켜 버립니다. 밤마다 비서실장 시켜 여대생들 바꿔가며 밤문화를 즐기다가 1979년 10월 26일, 그날도 여대생 옆에 끼고 술마시다 총에 맞아 죽습니다.


친일파에게 다시 위기가 왔습니다. 아, 이놈의 위기는 잊을만 하면 옵니다. 그러나 또 구원투수가 등장합니다. 전두환이 12.12.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권을 장악한 겁니다. 친일파들은 이제 기꺼이 전두환의 품에 안깁니다. 1980년 5월 18월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총질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지들끼리모여 지들끼리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합니다. 박정희 때 공화당 인사들은 이제 전두환의 민정당을 구성합니다.


1987년 6월. 또 위기가 옵니다. 전국민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겁니다.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통령을 니들끼리 뽑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뽑겠다고 주장합니다.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선물하려던 전두환은 어쩔 수 없이 이에 굴복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역사적 선거가 시작 되었습니다. 
친일파들은 긴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말 기적 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왔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싸우다 후보단일화를 못해 표를 갈라 먹은 겁니다. 결국 노태우가 35.9%의 득표율로 턱걸이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친일파는 또 살아 남았습니다. 아, 미칠 노릇입니다.


그리고 죽어도 대통령 한번 해먹겠다고 결심한 김영삼은 마침내 노태우에게 항복합니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을 하여 민자당을 만듭니다. 유일한 민주화 세력이 된 김대중은 고립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대선에서 민주화 운동의 경력을 팔아 넘기고, 양심을 팔아넘기며 친일파, 군사독재 세력과 손을 잡은 김영삼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당 이름은 신한국당이라고 바꿉니다. 그리고 나라를 하나 하나 말아 먹다가 1997년 IMF 사태를 일으킵니다. 나라가 부도가 났습니다. 수많은 회사들이 망해 넘어 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소주병을 들고 한강에 뛰어 내리고 목을 맸습니다. 신한국당은 슬쩍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고작 당 이름을 살짝 바꾼 것만으로 나라를 부도 상태로 몰아 넣은 그들은 대선에서 약 40%의 득표율을 기록합니다.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티끌만한 차이로  마침내 김대중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뤄냅니다.


친일파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패닉에 빠진 그들은 그러나 5년만 참자고 다짐합니다. 5년 동안 열심히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욕합니다. 스즈끼가 하림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듯, 이들이 살아남는 길은 무조건 상대방을 빨갱이라고 몰아 붙이는 겁니다. 그러나 5년 뒤 선거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노무현에게 또 패합니다.
미칠 것 같습니다. 다시 5년 동안 빨갱이라고 몰아 붙입니다. 경제가 망했다고 외쳐댑니다. 서민 경제가 파탄이라고 외쳐댑니다. 마치 IMF를 김대중이 일으킨 것 같은 착각마저 일어날 지경입니다.

어쨌든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친일파 명부를 만들고 진상을 조사하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친일파들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정치적 탄압이라고 마구 훼방을 놓습니다.  그 과정에서 뉴라이트가 결성됩니다. 그냥 상대방을 빨갱이로 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과거 행적을 감추려 들지 않습니다. 아예 맞불을 놓습니다. 식민지시대가 좋은 시대였다고 우기기 시작합니다. 친일 행위를 정당화 하는 것이죠. 통계 자료를 가져와 식민지시대가 이렇게 경제 발전이 된 시기였다고 주장합니다. 근대화 시대였다고 주장합니다. 자신들을 친일파라고 부르지 말고 근대화 세력이라고 불러 달랍니다. 자신들을 군사독재 세력이라고 부르지 말고 근대화 세력이라고 불러 달랍니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친일 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됐지', '독재 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됐지' 그리고 이명박을 밀어줍니다. '범죄자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돼지', '사기꾼이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돼지'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이게 먹힙니다.


마침내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었고,  뉴라이트는 새로운 정부의 각료로 곳곳에 포진되었습니다. 이들은 지금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 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식민지 시대, 독재 시대를 근대화 시대로 바꾸겠노라고 수정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친일파-자유당-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이들이 권력을 놓친 시기는 딱 지난 10년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릅니다.


긴 글 읽느라 고생하셨는 줄로 압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이 나라에 지금 정의가 살아 있다고 보십니까?

 

 


출처 : 인터넷 곳곳에 떨어져있는 글을 주웠음.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산기의 M+ M- MRC 버튼  (2) 2013.06.19
홋카이도와 아이누 이야기  (0) 2013.06.17
대한민국 종교 인구 통계  (0) 2013.05.27
아프리카가 가난한 이유  (0) 2012.12.30
우리가 알고있는 엉터리 세계지도  (0) 2009.09.03
Posted by kanwa
:




우리에게 가장 흔하게 알려진, 1970년대 독일의 역사학자 아르노 페터스가 만든 메르카토르 도법에 의한 세계지도.

페터스는 메르카토르 도법에 의한 지도의 왜곡이 유럽을 중심으로한 선진 제국들의 오만함을 조장하고, 제3세계 개발도상국을 지도상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올바르게 이해하기 힘들도록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그린란드와 아프리카는 거의 같은 크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프리카가 14배나 더 크다. 유럽대륙이 남미대륙보다 더 커 보이지만 실제로는 남미가 2배나 더 크다. 알래스카는 멕시코보다 3배나 더 커보이지만 실제로는 멕시코가 더 크다.

 

 

메르카토르 도법

1595년. 네덜란드의 지도학자 메르카토르가 고안한 투영법으로, 이 지도를 사용하여 출발점과 목적지를 직선으로 연결하면 목적지에 정확히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신대륙의 발견과 대항해시대의 요구에 적절히 부응하는 항해용 지도로, 화려했던 정복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린 세계지도에는 문제점이 있는데, 적도 부근은 거의 정확하게 투영되지만, 고위도로 갈수록 간격이 실제보다 확대되면서 면적이나 형상이 크게 왜곡된다는 것이다. 즉, 미국을 포함한 북아메리카, 유럽 등은 크게(자세하게) 표현되는 반면, 흔히 제3세계로 불리는 중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은 작게(대충) 표현된다.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산기의 M+ M- MRC 버튼  (2) 2013.06.19
홋카이도와 아이누 이야기  (0) 2013.06.17
대한민국 종교 인구 통계  (0) 2013.05.27
아프리카가 가난한 이유  (0) 2012.12.30
이 나라 근대사의 진실  (0) 2009.09.03
Posted by kanwa
: